John 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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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투옥

후스는 그의 상태를 친구들에게 알리려 프라하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온 구원! 사랑하는 자들이여! 나는 모든 면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게. 나는 교황의 안전 통행권 없이 콘스탄츠에 왔네. 나를 반대하는 행동들을 계속 알리는 면죄부 판매자에 의해 자극되어 나를 대적하는 이들이 몹시 많고 강하니 하나님이 내가 변하지 않게 하시도록 기도해 주게. 하지만 나는 그들중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 하지도 않네. 대단한 전쟁 뒤에는 위대한 승리가 있으리라 믿고 승리 후에는 더 큰 보상과 핍박자들의 더 큰 좌절이 있을 것을 신뢰하니까. [15 ]

몇몇 주교들의 속임수와 책략으로, 후스는 개인 숙소 에서 붙잡혀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독일 황제가 콘스탄츠로 갔다 돌아오는 안전 통행권을 보장했었기에, 보헤미아 황제는 이러한 사건을 듣고 분개하며 반응했습니다. 그 자신이 감옥 문을 부수고 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럼에도, 도착했을 때, 이단에게 한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고 그러므로 무죄하다는 논거에 굴복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혼미함에 패배하여 황제는 후스를 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아 그는 사제들과 수도사들의 책략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 지하 감옥은 어둡고 침침했습니다.

주님은 그와 함께 지하 감옥에 서 계셨습니다.

그 감옥은 하수도와 강이 연결된 곳에 위치했습니다. 그곳에서 눕거나 앉거나 하며 거의 세 달을 보냈습니다. 몇 주되지 않아 그는 고열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류마티즘과 담석과 지속적인 구토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삶을 단념했습니다. 환경의 고통은 적의 있는 사제들이 와서 그를 조롱하고 괴롭혀 더 심각해 졌습니다. 후에, 후스는 73일 동안 사슬에 밤낮으로 묶여있던 콘스탄츠 주교의 성으로 옮겨졌습니다. 비록 그의 몸은 쇠약했지만 그의 저항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와 함께 지하 감옥에 서 계셨습니다.

밀러는 그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

주인은 그 날에 그분의 종과 동일시 되기를 잊지 않을 것이고 가장 감동적으로 하실 것이다 -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것이니라 하시고 ”. 그것이 황제의 죄라면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의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백보좌에게 맡긴다. [16]

성도들에게 보내는 다음 편지에서 후스가 보여준 주님에게 의지하고 형제 자매들의 기도에 의지하는 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도 바울을 상기시켜 주는 듯 합니다. :

사랑하는 자들이여! 감옥에 누워있지만 그것이 부끄럽지 않네. 이는 내가 주 하나님을 위해 소망 안에서 견디고 있네. 내가 간청하나니 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위해 기도해 주게. 그분은 긍휼로서 중병을 갖고 나를 찾아 오셨다가 다시 나를 고치셨다. 그분은 내가 많은 선을 행하고 사랑하는 이들인 매우 굳게 결심한 적들로 나를 공격하게 하셨다. 그분 안에서만 내가 소망하고 여러분들의 기도 안에서만 그분이 나에게 죽기까지 그분의 은혜 안에서 견고하게 남아있게 하실 것이네. 지금 나를 그분께로 데려가시는 것이 그분의 기쁨이라면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뤄지길 원하네, 하지만 그분이 나를 돌려보내시길 기뻐하신다면 마찬가지로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네, [17]

심리와 심판

공의회는 죽은지 30년이나 되는 위클리프를 정죄했습니다. 그의 저술들은 불태워지고 그의 시신은 파내어져 태워지고 그 재들은 강에 뿌리워졌습니다. 그 정도로 위클리프를 미워했습니다. 자칭 공청회라 하는 공의회 앞으로 후스를 데려왔습니다. 6월 5일부터 7월 5일까지 한 달 이나 진행되었습니다. 후스와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관해서 비슷한 말들을 하였습니다. 후스는 공의회가 왜곡하고 오보한 위클리프의 가르침들에 대해 위클리프를 변호했습니다. :

…그는 모두가 “이단적이거나 잘못되거나 경건한 이들에게 무례하지 않지만” 몇몇은 받아들여질 만하고 정통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며 위클리프의 45개의 글들을 정죄하는 것과 연관되어 주장했다. 사실상, 이 글들중 많은 것이 부정확하게 인용되고 위클리프가 의미하지 않은 잘못된 의미로 전달되었다고 여겼다. [18]

후스는 그의 가르침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 유사함의 근원을 지적했습니다. :

실로 내가 고백하기를 나는 종교 신학 교수인 요한 위클리프 선생님이 제의한 참된 의견들을 붙잡는다. 이는 그가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그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19]

공의회가 위클리프의 저술들에 사용한 같은 책략 - 잘못된 인용, 문맥을 벗어나 인용된 본문, 허위 진술, 의미의 왜곡, 등등 - 을 후스의 저술들에도 사용했습니다. :

그러므로 공의회가 정죄한 것은 사실상 후스 자신의 교의가 아니라 그의 대적들이 작성한 비난들이었다.

후스는 그가 틀렸다는 성경적 증거를 보여준다면 공의회의 “지시와 교정” 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계속하여 선포했다.

후스는 그가 틀렸다는 성경적 증거를 보여준다면 공의회의 “지시와 교정”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계속하여 선포했다...그의 그리스도인 행동의 기준은 공의회의 그들보다도 더 높았다. 성령의 감동 아래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의 행동과 반대되었다.

…그 심리는 교회의 법규와 학문적이거나 유명론자 신학에 근거한 원칙에 전념한 사람들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그러한 원칙들은 교회를 주로 법인으로 여기고 후스는 그 자신은 오직 성경에만 기초했다. …. [20]

후스에게 그의 책에서 발췌했다고 하는 44개의 논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논설은 최고 기소자인 팔레치(Palec)의 작품이었습니다. 후스의 저술에서 그가 인용한 것들은 잘못되었고 부정확했으며 어떤 부분은 그가 꾸며낸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논설은 후스가 자기 자신이 신격의 네 번째 인격이라고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 비방은 명명하거나 제시되지 않은 어느 의사가 하기로 한 증언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후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이 불쌍하고 가련한 자인 내가

하지만 내가 확고히 주장하나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하나님, 한 본질이다.

내 자신을 신격의 네 번째 인격이라고 생각한 적은 전혀 없다. 이는 내가 마음에 담아 본 적 조차 없다. 하지만 내가 확고히 주장하나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하나님, 한 본질이다..... [21]

공의회의 결정은 후스의 저술들이 이단적인 혐의가 있어서 불태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스 자신은 정죄 받고 죽음에 처했습니다. 판결을 읽어 내려갈 때 후스는 무릎 끓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가 당신께 간청하나니 내 모든 대적들을 당신의 위대한 긍휼을 위해 용서하소서. 당신은 그들이 나를 거짓 비방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거짓 논술들을 날조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긍휼을 위하여 그들을 용서하소서!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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